사진 짓는 사람_전우용 역사학자
한국어에서 ‘짓다’라는 동사는 특별하다. 이 동사와 결합할 수 있는 명사는 표정, 웃음, 눈물, 한숨 등 심리상태를 즉각 표현하는 것들과 글, 시(詩) 등 이성과 감성을 다듬어 표현하는 것들이다. 농사, 밥, 옷, 집도 ‘짓는다’고 한다. 한국어 ‘짓다’는 영어 make, build, construct 등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이들 중 어느 단어도 그 뉘앙스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 ‘짓다’는 ‘마음으로 만들다’, 또는 ‘정성을 다해 만들다’라는 뜻이다. 사진작가 하만석은 19세기 한국인들이 지은 최고의 건축물인 경복궁에서, 역시 한국인들이 지은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정성껏 담았다. 그에게는 사진도 ‘짓는 것’이다.
1945년 8월 16일, 서울에 있던 소련 여성 파냐 이사약고브나 샤브쉬나는 그날의 광경을 “대부분이 하얀 명절옷을 입고 있어 끝없는 흰바다가 흔들리며 들끓는 것 같았다.”라고 묘사했다. 그가 보기에 ‘하얀옷’은 한국인의 ‘집단 정체성’이었다. 인류가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한 이래, 이 물건은 늘 ‘개성’이 아니라 ‘집체성’을 표현했다. 어느 지역에서나 이른바 ‘민족의상’의 기본 디자인은 같았으며, 신분에 따라 소재와 색깔에 차이를 두는 정도였다. 같은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은 같은 형태의 옷을 입었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바느질 솜씨와 세탁 횟수 정도였다. 옷에 ‘개성’이 담기기 시작한 것은 민족들 사이의 교류가 본격화하고 개인들이 공동체에서 해방된 이후의 일이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을 계기로 유럽인 주도의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급속히 늘어났고, 지구 전역에서 문화간 접촉이 본격화했다. 견(絹), 면(綿), 마(麻), 모(毛)의 4대 섬유 문화권도 통합되기 시작했다. 의복 양식의 통합은 유럽에서 먼저 일어났다. 유럽인들이 교역과 교류의 주도권을 쥐었기에, 유럽적 의복 양식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모방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19세기 말부터 유럽의 의복 양식을 ‘양복(洋服)’이라고 불렀다. 유럽과 미국에서 전래한 것들에 ‘양(洋)’을 접두어로 붙이던 조어법의 소산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양’은 ‘신(新)’이자 문명이었다. 처음 양복을 입은 한국인은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간 서광범이었다. 1895년, 조선 국왕은 단발령을 내렸다. 모든 남성에게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단발(斷髮)을 하라는 명령이었다. 국왕이 먼저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었다. 단발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철회되었으나, 일단 머리모양을 양식으로 바꾼 사람들은 의복과 신발도 양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일본옷인 ‘화복(和服)’과 청나라 옷인 ‘호복(胡服)’을 입고 다니는 외국인도 많아졌다. 한국인들은 각자의 형편과 취향에 따라 여러 문화권을 표상하는 옷들의 전부 또는 일부를 채택했다. 남성의 경우 갓, 망건,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 짚신으로 구성된 옷을 갖춰 입는 것은 ‘시대에 뒤쳐진 행위’로 취급되었다. 전래의 옷과 양복을 섞어 입는 ‘문화 절충형’ 인간이 늘어났다. 여성의 옷에도 변화가 생겼다. 치마 길이가 짧아졌고 저고리 깃이 높아졌으며, 옷 색깔도 다양해졌다. 물론 유럽과 미국 문화에 동화하려는 열망에 불타던 신여성(新女性)들은 ‘양장(洋裝)’을 차려 입었다. 변화 과정에 있던 한국인들의 옷은 다른 문화권 옷들과 접촉, 교류하는 과정에서 ‘조선옷’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식민지 상황에서 옷에 담겼던 보편적이고 절대적이었던 집단 정체성이 특수화, 상대화한 결과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게 ‘조선식’이라는 말은 낙후의 표상이었다. ‘조선옷’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들 스스로 ‘조선옷’을 천대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주민들에게 ‘전시 생활복’을 입으라고 강요했다. 남성은 군복과 비슷한 ‘국민복’을, 여성은 일본식 작업복인 ‘몸뻬’를 입어야 했다. 이 지시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비(非) 국민’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대패한 이후 흰색 조선옷을 입고 거리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미군 비행기의 폭격에 대비한 방공(防空) 훈련이 거듭되던 때였다. 미군은 일본인들만 공격할 것이라고 믿은 한국인들은 ‘흰색 조선옷’으로 자기 정체성이 일본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물론 일본 경찰은 이런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흰옷에 검은 물감을 뿌려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웠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패망했고 조선인들은 ‘해방’되었다. 조선인들이 ‘흰 명절옷’을 입고 거리에 나선 것은 자기 정체성의 해방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샤브쉬나가 본 것은 바로 ‘해방된 정체성의 파도’였다.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고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조선옷’이라는 이름도 ‘한복(韓服)’으로 바뀌었다. 이름만이 아니라 옷의 정체성도 바뀌었다. 나일론 등 합성섬유가 흔해지고 염색산업이 발달하면서 한복의 소재와 색채 모두가 달라졌다. 그보다도 한복 입는 사람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교복과 군복이 모두 ‘양식’을 채택한 것도 옷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수성을 바꿨다. 1960년대부터 한복은 결혼식 날이나 명절에만 입는 예복처럼 되었다. 예복인만큼 소재, 색채, 디자인이 모두 고급화했다. 1960년대 이후의 한복은 그 이전의 한복과는 사실상 다른 옷이었다.
하만석이 무대로 삼은 경복궁도 마찬가지다. 1395년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으로 창건된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이 궁궐은 1867년에야 재건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1915년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이름의 박람회를 열면서 그 안의 전각 대부분을 헐어버렸다. 1926년에는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양식 건물’과 ‘조선식 건물’ 사이의 대비를 연출했다. 조선총독부는 문명, 선진, 일본을 상징하는 건물이었고, 경복궁은 야만, 후진, 조선을 상징하는 건물군이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해방 40주년인 1995년에야 헐렸고, 그 때부터 경복궁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의 월대(月臺)는 2023년에야 복원되었다. 하지만 복원된 경복궁은 전통 경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관의 구성 요소가 됐다. 하늘에서 산으로, 산에서 다시 궁궐로 하강하는 경관의 수직적 위계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의 경복궁 주변에는 양식 고층건물들이 즐비하다. 오늘날의 경복궁은 ‘양식(洋式)’에 둘러싸인 채 그들과 어울리려 애쓰는 ‘고립된 전통’의 표상이다.
10여 년 전부터 서울 북촌과 전주 한옥마을 등 ‘고립된 전통’을 표상하는 장소들에 한복 대여업체들이 생겨났다. 이들 업체에서 한복을 빌려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급증했다. 현대 세계의 보편적 도시경관 안에 조그맣게 남아 있는 한국의 전통공간 안에서 한복을 입고 다니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도 이색적인 경험이다. 사실 한복에서 받는 ‘이색적인 느낌’은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한복도 한옥도 한국인들이 세계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타 지역 문화요소들을 흡수하고 그것들과 어울릴 방도를 찾으면서 재창조한 것이다. 물론 이를 ‘가짜 전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에릭 홉스봄이 말한대로, 전통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적인 것’ 안에 이미 ‘세계적인 것’들이 들어와 있기에, 외국인들도 이들 물건에서 ‘인류적 보편성’을 발견한다.
사진가 하만석은 한복을 입고 한국 궁궐을 관람하는 외국인들에게서 서로 다른 문화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융합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담겼다고 믿어왔던 궁궐과 한복이 외국인의 몸에도 어울린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문화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국인들의 통념에 부합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았다. 예술은 본디 통념과 싸우며 시대와 불화(不和)하는 작업이다. 한국인의 몸에 어울리는 양복이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외국인의 몸에 어울리는 한복도 이상하지 않다. 그의 사진들은 각 민족의 ‘전통들’이 세계가 구체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창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통념을 내리치는 벼락과도 같다. 그의 사진들을 통해 우리는 세계와 인류의 보편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을 새로 지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만석이 짓고 있는 사진세계 안에서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은 더 밝게 빛난다. 그가 자신의 사진세계를 더 높고 더 크게 지어올리기를 바란다.